
현재 한국에서 스윙댄스를 추시는 분들은 크게 4가지 종류의 춤을 추시게 됩니다. 린디합,블루스,발보아를 총칭해서 스윙댄스라고 하며 약간 다른 장르의 웨스트코스트 스윙이 있습니다. 스윙댄스를 조금이라도 춰보신 분들이나 아니면 영상에서 보신 분들은 아주 흥미로운 장면을 보신적이 있을 겁니다. 방금 전까지 스윙 음악에 맞춰 신나게 린디 합을 추던 사람들이, 갑자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만큼 빠른 곡(BPM200이 넘어가는)이 나오면 발보아 스텝을 밟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밤이 깊어 아주 느리고 끈적한 곡이 흘러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춤의 템포를 확 낮춰 블루스를 추죠. 겉보기엔 스텝도, 느낌,커넥션도 완전히 다른 이 세 가지 춤은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세가지 춤은 완벽하게 똑같은 DNA를 공유하고 있는 '재즈가 낳은 세 쌍둥이'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한 뿌리에서 나와 각기 다른 매력을 갖게 되었는지 그 흥미로운 진화의 역사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1) 살아남기 위해 변해야 했다: 템포와 댄스홀이 만들어낸 진화
스윙 재즈, 블루스, 발보아는 모두 아프리카 특유의 폴리리듬(Polyrhythm)과 엇박자(Off-beat)를 뼈대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생각해 보면 흑인들은 아픈 노예무역을 통해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추는 춤에 아프리카 특유의 리듬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춤은 미국으로 넘어오면서 또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아야만 했습니다. 기존 포스트에서 함께 살펴보았던 사보이 볼룸(Savoy Ballroom)을 떠올려 볼까요? 무려 60미터가 넘는 거대한 사보이 볼룸의 플로어에서는 댄서들이 공간을 넓게 쓰며 원심력을 폭발시킬 수 있었습니다. 파트너와 최대한의 거리를 만들어서, 커넥션으로 춤을 출 수밖에 없는 스윙 아웃이나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에어 스텝 같은 화려한 린디 합이 탄생하기에 더없이 완벽한 환경이었죠. 하지만 모든 댄스홀이 사보이 볼룸처럼 넓었던 것은 아닙니다. 만약 공간은 좁아 터지겠는데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밴드마저 미친 듯이 빠른 음악을 연주한다면 댄서들은 어떻게 춤을 춰야 했을까요? 똑같은 재즈 리듬을 타면서도 다른 사람과 부딪히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댄서들의 신체는 전혀 다른 방식의 움직임을 본능적으로 발명해 내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아무래 체력이 좋아도 좁은 공간에서 하루종일 빠른 노래가 나온다면 댄서들도 금방 지치게 됩니다. 이러한 환경의 차이가 춤의 형태를 가르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된 것입니다.
2) 발보아(Balboa): 200 BPM의 미친 속도에서 살아남는 밀착 생존법
193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 해변가에 위치한 랑데부 볼룸(Rendezvous Ballroom)은 언제나 춤을 즐기고 싶은 수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빅 밴드들이 이곳에 와서 BPM200이 훌쩍 넘어가는 초고속 스윙 템포의 음악을 무자비하게 쏟아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곳은 사보이 볼룸과는 다르게 공간이 협소했습니다. 그곳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춤을 즐기고 있으니,린디 합처럼 팔을 뻗고 크게 회전했다가는 당장 옆 사람과 부딪혀 대형 사고가 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댄서들은 궁여지책으로 파트너와 최소한의 공간도 없이 완전히 밀착시킨 클로즈드 포지션(Closed position)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체의 움직임과 거대한 액션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대신, 남은 모든 에너지를 '발끝'으로 모았습니다. 두 사람의 몸을 딱 붙인 채 무릎 아래의 정교한 풋워크만으로 잘게 쪼개진 200 BPM의 리듬을 기가 막히게 타는 이 춤이 바로 '발보아(Balboa)'입니다. 린디 합이 밖으로 뻗어나가는 폭발적인 에너지의 발산이라면, 발보아는 파트너와의 내밀한 커넥션 안으로 에너지를 지독하게 응축시키는 춤 입니다. 화려한 과장 없이도 맞닿은 가슴을 통해 상대방과 심장 박동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발보아는, 초고속 템포라는 극한의 상황이 빚어낸 가장 세련되고 정교한 스윙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3) 블루스(Blues): 모든 화려함이 끝난 새벽 2시의 진짜 교감
그렇다면 음악의 템포가 심연으로 가라앉을 만큼 느려질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느린노래에 린디합처럼 역동적인 춤을 출수도 없고, 발보아 처럼 스텝만으로 춤을 추기엔 너무 지루함을 느낄수 밖에 없을 겁니다. 스윙 재즈 시대의 화려한 관악기 소리 이전에, 미국 흑인들의 고단한 삶과 영혼의 아픔을 달래주던 가장 원초적인 음악, 바로 '블루스(Blues)'가 그 답을 쥐고 있습니다. 화려한 잼 서클이 끝나고 재즈 클럽의 열기가 식어가는 심야 시간, 무대 위의 밴드마저 무겁고 끈적한 블루스를 연주하기 시작하면 댄서들은 화려한 스텝이나 점프를 멈춥니다. 대신 자신의 무게 중심(Pulse)을 땅을 향해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힌 채 파트너와 온전히 교감하기 시작합니다. 블루스 댄스는 정해진 패턴에 얽매이지 않고, 느린 리듬 사이의 거대한 여백(Lag)을 두 사람의 깊은 호흡과 서로의 연결로 쫀쫀하게 채워 넣는 춤입니다. 예를 들면 한때 유행했던 '프리허그' 처럼 상대방을 안아주고,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주는 춤이 블루스 였습니다. 결국 스윙이 뿜어내는 폭발적인 환희, 발보아가 보여주는 치밀한 정교함, 블루스가 위로하는 짙은 슬픔은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을 '재즈'라는 하나의 언어로 연결이 됩니다. 자, 그렇다면 댄서들을 이렇게 뛰고, 쪼개고, 껴안게 만들었던 그 거대한 음악적 파도는 대체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다음 포스트에서는 댄스홀의 천장을 날려버릴 듯 포효했던 위대한 빅 밴드(Big Band) 시대의 웅장한 서막을 활짝 열어보겠습니다.